인식의 우선권과 평가의 이분법을 넘어
글/ 배민영(예술평론가)
전시장 공간은 기본적으로 부여된 환경이다. 거기에 작가는 기존에 해온 작업들이 갖는 고유한 특성과 연결 지향, 그리고 새로운 공간에 대한 분석과 상상을 토대로 연출될 맥락을 고려해 신작을 만들고, 드디어 채워 넣는다. 정확히는, 숨을 불어 넣는다. 그것은 물론 전적으로 작가의 자유에 맡겨야 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 알게 모르게 여러 주체의 통제와 요구, 그러니까 요청과 간섭이 끼어들고 결국은 어떤 평가가 따르기도 한다. 극장 문을 열고 나오면 반강제적으로 보게 되는 공간, 입구에 들어서면서 마주하게 되는 기둥 하나와 ㄱ자로 꺾이며 관람하게 되는 특이한 동선. 이에 대해 어떤 작가는 난처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간 디자인적 감각과 조각에 대한 능숙하고 과감한 설치 경험을 지닌 박예지에게 있어 이러한 환경은 폭력적이기보다는 도전적이었을 것이고, 특이하기보다는 특별했을 것이다. 모든 벽과 기둥은 전시를 보러 왔든 보러 오지 않았든 지나가는, 또는 코너에 몰린 관객에게 주도권을 가지고 말을 걸고 있었고, 전시 기간 작가는 특유의 책임감으로 성실하게 자신을 어필했다. 때로는 말을 듣든 말든,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말이다.
‘말’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그 자체로 실체인 무엇이다. 기독교 중심의 서구적 세계관에서는 “말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 ‘ōrāre’에서 유래, 인간의 물음에 신이 대답하거나 예언을 하는 사제를 가리키는 신탁oracle을 매우 중요한 매개로 여겨왔다. 이는 신이 보낸 표식을 해석하는 선견자manteis와는 다른 개념으로, 신들이 사람들에게 말하는 ‘문’으로 여겨졌다. 즉, 인간에게 있어서 오랜 역사동안 언어는 구두를 바탕으로 하고 직접적이며, 여러 형태의 시각 언어에 앞서는 우선권priority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인간의 욕망과 그로 인한 실패와 분열을 상징하는 바벨탑 신화 역시 언어와 관련이 되어 있다. 지금도 특출난 언어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한평생 살면서 언어적으로 자신의 국경을 넘지 못하는 운명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언어는 자신의 생각을 지배하고 강력히 반영할 뿐만 아니라 사고방식을 제약하는 국민국가주의nationalism적 문화양식이기도 하다. 다행히 박예지는 그 문화양식에서 조금은 자유로운 인간이다. 물론 유학파들이 겪는 흔한 정체성 고민의 시간이나 인종차별에서 오는 언어적 표현과 선택의 외적, 내적 검열과 제약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2개 국어 이상을 한다는 것은 분명 표현의 호환성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하는 자산이다. 언어유희가 가능한 부분이 있다면 그에 대한 차용 권한 역시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어에서 동물 중에 말馬이 있다는 사실은 필연적이고도 적당한 언어유희를 제공해왔다. 그것을 외면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물론 말 자체를 소재로 시각 예술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소재의 방대함도 있겠지만, 말이 갖는 이미지적 성격 이전에 말의 여러 본질적 속성을 파악해야 한다는 일종의 지적 의무가 주어지는 부담되는 작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본질은 또다시 추상과 구체 모든 부분에서 공격을 받을 수 있으며, 그 영역은 철학, 미학, 언어학, 심리학 및 여러 분야의 사회(과)학, 디자인학까지 그 범위와 출신을 가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말에 대한 근/현대적 시각 예술에서의 안전한 선택은 대개 특정 언어의 묘한 시각적 아름다움과 조합에서의 즐거움을 보여주는 ‘유희적 연구’를 보여주거나 타이포그라피 디자인으로 재현하는 것이거나, 아예 말의 실체성을 부정하거나 해체하는 포스트모던적 연구에 투신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예지의 ‘말과 생각’에 대한 표현은 매우 희소하다. 그저 말이 좋아 청소년기부터 10년간 프랑스에 가 말에 관한 여러 경험을 했고, 작업의 소재도 말인 작가에게 그 말이 아닌 말language 역시 작업의 중요한 한 축이라는 사실을 듣고 처음에는 이게 무슨 말장난인가 싶을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이 말을 한다.”랄지, 잊을만하면 다시 소환되는 추억의 말장난은 마치 어떤 생명이라도 부여받은 것처럼 세대 차이의 격랑 속에서도 파도를 넘어 전승된다. 한국 특유의 동음이의어 중에 “하필 ‘말’이 있어서”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저 비현실적이고 무의미할 법하며 별 재미도 없는 이런 어폐를 왜 우리는 의미 있게 곱씹을까. 새삼 박예지의 이번 전시를 통해 생각해본다. 작가는 포스트모던적 연구에 투신하지는 않았으나, 특정 언어의 묘한 시각적 아름다움과 조합에서의 즐거움을 보여주는 쪽은 아니다. 그저 근/현대적 시각 예술에서의 안전한 선택을 위해서가 아닌, 아르곤 철 조각이라는 현대적 시각 예술을 기반으로 하되 소재와 생각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시도로 자신의 언어를 확장해 간다는 측면에서 자연스럽게 탈현대성을 획득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말과 생각’ 연작을 중심으로 한 레토릭의 세계는 신작들이 도전적으로 말을 거는 행위와 결부되며 구두 언어가 가진 우선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시각 언어의 우선권을 동반 상승시킨다. 마치 박예지에 있어 말馬은 신탁oracle이라도 되는 듯 단순한 취향이 아닌 작업에 대한 생각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시각 언어이자 영감을 받는 ‘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말의 의미는 재미 위의 어떤 영역인 것만은 분명하다. 부연하자면, 마치 재미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처럼 농담을 즐기기도 하고 박장대소를 하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관심과 사랑, 그리고 배려가 만들어낸 자신만의 언어로써 감당하기로 한, 국경을 초월해 ‘너무나도 인간적인’ 행동임을,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인정하는 진정성이 있다.
그 단서는 다름 아닌 ‘말과 생각’을 잇는 ‘경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경험은 다시 ‘환경’과 ‘대응 방식’이라는 두 영역으로 나뉘며 대응 방식은 다시 ‘인식 – 행동 – 평가’의 순서로 설명할 수 있다. 환경이란 주체의 의지와 관계없이 형성된 시간과 공간의 여러 특성들과 부수적 요소들을 말한다. 그리고 대응 방식은 그에 대한 긍·부정적 방향과 소극적부터 적극적 관여로 분석, 열거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가장 소극적 방식이다. 그런데 그 안의 인식, 즉 생각의 깊이나 스트레스의 정도가 얼마나 깊거나 얕은지는 확정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도 그것이 소극적인 방법을 취한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그 주체의 평소 습관이나 표현해 온 사상적 경향을 바탕으로 미루어 짐작하고, 대화를 통해 확인을 시도할 뿐이다. 그러다 보면 그것이 무시인지 묵인인지, 만족감에 의한 자연스러운 무반응이었는지 판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말과 생각은 단순한 이원적 구조가 아닌, 기억, 감정, 관계, 순환 등과 같이 우리에게 늘 추상적이어서 어려운 삶의 과제들이 어떤 소재를 만나 풀어나가질 때 갖는 특별한 의미일 것이다. 말馬을 소재로 말言語에 대한 작업을 하는 박예지에게 말은 말 이상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말’은 ‘어떤’ 말일까. 일일이 평가하지 않는 불친절함처럼 말은 우리에게 늘 유실된 정보들로 내달린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그 말을 따라가지 못한다. 작가의 스스로 치열하게 써내려간 노트에서 발견한 문장. “무의식을 지배하고자 뇌속임을 해보았다.”는 고백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과 생각은 마치 실과 바늘, 천둥과 번개처럼 얽힌 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로 다른 형태로 같이 간다. 그러므로 언어의 현실 반영론과 구성론의 논쟁, 랑그langue와 빠롤parole의 우열 경쟁이 사실상 종식된 우리 시대, 다시 돌아가는 말과 생각의 오묘한 동반 관계에 대해 작가는 자신의 주요 언어인 스틸 입체 작업으로 말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대체로 미니멀한 작업을 해온 박예지의 이번 평면적 부조 작업들은 여전히 절제미를 보여주지만 자세히 보면 생각의 복잡함을 호소하는 듯 꽤 친절하게 뇌의 감각을 표현하고 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의 작업들이 현실과 허상의 경계에 존재하는 것들을 표현했다면, 박예지의 작업들은 인식과 행동의 경계에 존재하는 것들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행동이 형태고 인식이 실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나, 꼭 그렇지는 않다. 인식과 행동은 실과 바늘과 같은 불가분의 관계에서 말과 생각을 구성하는 지척의 요소인지도 모른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 형태는 실체에 대한 재현을 추구하지만 결코 장악하지 못한다.
가령, 자신의 의견과 생각에 대한 인정 욕구가 커 보인다는 평을 들은 어떤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해본 적조차 없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이들은 이에 대해 그저 어이가 없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 유무에 대한 진술은 그 사람의 진실성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인식의 완고함과 생각의 다층적 구조라는 내적, 외적 환경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 주체에게 있어 의견은 이미 학습된, 그래서 객관과 주관이 어느 정도 조화된 결과의 언어적 습관일 확률이 높다. 그렇기에 그것을 피력함에 있어 인정 욕구가 큰지, 작은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는데, 이에 대해 평가를 받는다면 자신은 ‘인식과 행동’을 했을 뿐이라고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의 ‘인식과 행동’에 대한 인식까지 진술해야 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기에, ‘말’이라는 행동에 대해 다시 ‘말’로써 행동하게 되는 다층적 구조에 들어서면 그것이 단지 한 겹만 더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커다란 스트레스를 받거나 그것을 부정부터 하고 보는 인지부조화 상태에 이르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앞서 말한 ‘말장난의 역사성’이랄지, 말馬을 소재로 말言語에 대한 작업을 하는 박예지의 미니멀리즘적 표현의 선택은 인식의 우선권과 평가의 이분법을 넘어 하나의 ‘추상적 구체’를 도출해보겠다고 하는 패기로 읽히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번 전시에서 만나게 된 여러 형태의 말머리 형상들을 보며 사냥꾼의 전리품으로 느끼는 이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말로 하자니 길고, 그렇다고 말없이 보여주자니 입이 간지러운 ‘말의 초상’인지도 모른다. 특히 신작들은, 사실주의적이진 않지만 사실은 우리의 심리와 사고 습관을 ‘사실fact에 대한 탐구’에 기반해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성실성은 단지 전시장에 열심히 나오는 결과로서가 아니라 말을 듣든 말든,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자신을 어필하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 때문일 것이고, 인생은 어차피 이런 저런 말과 생각을 끊임없이 하다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조숙한 10대 소녀의 딜레마와, 언어적 장벽과 인식의 속도에서 발생하는 설단현상 등 여러 환경 요소들에 대한 그 나름의 대응이리라.
여기까지 내달렸으니 말장난 아닌 말장난을 쳐볼까. 말을 치졸하게 대하는 태도를 말할 때 “말꼬리를 잡는다”고 하는데, 박예지는 “말머리를 잡는다”. 사실 말은 짐승이므로 “말대가리”라고 해야 맞는 말이라는 건 다 아는 말일 것이므로 말도 사람처럼 생각하는 동물로 치환해주는 “말머리”라는 말은 우리의 생각이 어떻게 시작하느냐부터 그 시작의 시작은 무엇인가. 즉 어떤 생각에서 나온 형태인가를 생각게 한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병적으로 동어반복을 싫어하는데, 이번에는 ‘말’과 ‘생각’이라는 말만 작정하고 여러 번 반복했다. 그 이유를 생각해주었으면 하는 욕심이 있다. 우리는 과연 다른 사람의 말과 생각에 어떤 인식의 우선권을 부여하고 평가할 수 있는가. 그 자유와 책임은 어디로부터 오고 어디까지인 것일까. 꼬여 있거나 엉켜 있다가도 풀리고 흘러내리는 말과 생각의 흔적들은 단단하지만 물렁물렁한 조각, 이라기보다는 어떤, 형태로 실체를 곱씹는다.
Adjust the opacity to set the color.